和 順 崔 氏
시조 오산군(烏山君 諱 世基)
최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몇몇 명문 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전기 평장사 문하시중을 역임하신 시조(始祖) 휘 세기(世基)께서 인종 4년(서기 1126년) 5월 오산군(烏山君:화순의 옛 이름인 烏城, 山陽의 머리글자를 취합함.)에 봉해져 왕권 확립을 위한 남도 안찰사로 화순읍 갱정 마을에 입향, 일문을 이룸으로써 우리를 화순 또는 오산 최씨(烏山 崔氏)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세거지에서 삼정승 팔판서를 배출하였다하여 만연산 아래의 마을을 팔판동(八判洞)이라 부르고 이 마을의 한 우물을 우리 조상들이 고향을 떠날 때“다시 돌아 와 이 물을 마시겠다.”라고 하여 갱래정(更來井), 한림정(翰林井) 또는 최씨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한 고을 작은 우물에 서린 천년 설화가 우리 가문의 유구한 역사요, 깊은 연원이라는 점에 외경심을 느낀다. 우리 문중은 고려시대에 많은 조상님들이 조정에 나아가 충성으로 보국하고 이도(吏道)를 지켜 시호를 받고 서원에 배향되는가 하면 현인일민(賢人逸民)의 공으로 정려를 받기도 하였다. 또 송광사가 배출한 16국사 중 제2대 국사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서기 1178~1234년)과 같은 고승도 우리 문중 출신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방어사공 휘 서지(湑之)계의 감찰공 휘 덕윤(德潤)파, 참의공 휘 원지(元之)계의 부사공 휘 자해(自海)파, 부정공 휘 자하(自河)파, 문정공 휘 자강(自江)파 등 4파로 갈라져 더욱 번성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충효 절의 청백 등으로 가문을 빛냈는가 하면 명리를 초월하여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인격 도야에 매진, 품격 높은 선비로 추앙받는 인물도 많이 나와 가문의 영예를 드높였다. 조상님들께서 이어 주신 이러한 역사도 자랑스럽지만, 그보다 우리 화순 최씨의 몸과 얼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경향각지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선량하게 사는 우리 종인 모두가 우리 화순 최씨의 빛나는 연원이요, 유래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화순 최씨 중에는 우리와 연원(시조)이 다른 일족도 있음을 밝힌다.
和順崔氏 大同 宗會 略史
우리 和順 崔氏는 여러 派, 여러 계대의 祖上들께서 忠臣, 名賢으로 家門을 빛내셨고, 部分的인 族譜를 刊行하기도 하셔서, 大小 各 支派가 血族의 矜持와 情을 가진 共同體로 綿綿이 承繼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宗人 全體의 뜻을 모아, 宗人 全體의 宗事를 遂行하는 和順 崔氏 大同 宗會, 바로 그 始原이 되었다. 그러나 和順 崔氏가 祖上을 追慕하고 宗人 相互間 親睦을 圖謀하며 祖上의 얼을 본받아 國家 社會에 寄與함으로써 家門을 빛내자는 綜合的인 宗事를 推進한 歷史는 그리 길지 않다. 各 派 宗人을 統合하고 參與하게 하는 大同 宗會 創立이 日淺한 까닭이다.
언제부터 인가? 每年 10月 初4日에 烏山君 歲一祭를 奉行해왔다. 西紀1956年 丙申年에는 烏山君 墓所 改莎草, 石物 具備, 位土 購入 等의 宗事가 있었다. 1958年 戊戌年에도 大同世譜 發刊 等의 大小 宗事를 遂行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宗事는 崇祖愛族의 精神이 透徹한 몇몇 宗人의 獻身과 奉仕로 이루어지는 極히 制限된 部分的 宗事였다. 그래서 뜻있는 宗人들이 全 宗人을 代表하는 機構의 必要性을 느끼고 論議를 擴大, 1970年 드디어 和順崔氏 大同 宗會가 서울에서 創立되었다. 이 創立總會에서 25世 副正公派 卿夏 初代 會長을 推戴하였다.
卿夏 初代 會長은 各 地域과 小派 宗中과의 連繫를 通해 宗會 發展을 꾀했으나 組織, 弘報, 財政, 等 宗會의 劣惡한 事情으로 2代 會長 在任期間(1972年~1977年) 동안에는 거의 宗事를 推進하지 못하였다.
이를 아쉬워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地方 居住 宗人들이 1977年 4月 26日 大田에서 非常總會를 열고 大同 宗會를 再建하면서 23世 文貞公派 源國 第3代 會長을 推戴하였다.
非常總會는 첫째, 烏山君 位土 增設, 둘째, 大同譜 修譜, 셋째, 和順 齋閣 建立 等 3大 事業을 設定하여 推進하기로 하였다. 그 後, 23世 文貞公派 鎬星 4代 會長 (1981~1983 在任), 26世 府使公派 興俊 5代 會長 (1983~1985 在任), 25世 副正公派 丞烈6,7,8,9代 會長(1985~1998 在任) 等이 在任 期間 동안 많은 宗人들이 參與하는 宗事를 推進, 1. 烏山君 位土 增設, 2. 甲子譜 編纂, 3. 和順齋閣<遠慕齋> 新築 竣工과 같은 大田 非常總會에서 決議한 우리 和順 崔氏 大同宗會의 3大 宿願 事業을 마무리하였다. 뒤를 이은 26世 文貞公派 大熙 10, 11, 12代 會長 (1998~2006 在任))은 貧弱한 宗會 基金 擴充과 後進 養成의 큰 뜻을 품고 率先하여 巨金의 私財를 出捐, 宗會 基金을 倍加시키는 한편 宗中 獎學會를 設立하여 每年 10名 內外의 優秀 學生에게 獎學金을 支給하는가하면 자라나는 後世들에게 우리의 뿌리를 알리는 敎育을 爲해 修練會를 두 차례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꿈들이 미처 꽃피기 前에 持病으로 幽明을 달리 했으니 哀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8世 副正公派 源龍 13代 會長은 2006年 就任 以來 14,15,16代 會長을 連任하면서 先代會長의 遺志를 이어 獎學基金 擴充에 盡力하는 한편 새로운 大同譜 編纂에 着手, 廣範圍한 資料 收集과 徹底한 考證을 通해 和順 崔氏의 1千年 宿題 인 烏山君 諱 世基의 和順 入鄕 時期 및 得貫 經緯와 高麗 第2代 眞覺國師 慧諶 스님이 우리 和順 崔 氏라는 事實과 甲子譜 合譜의 根據였던 和順君 諱 簿와는 淵源이 다르다는 史實을 밝혀 1984年 甲子譜 編纂 時 無理한 合譜를 爲해 어지럽혀진 上系를 바로잡은 바 있다.
이 같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뜻있는 宗人과 宗派에서 物心兩面의 同調와 協助가 잇달았는데 特히 初代 大同 宗會長을 歷任한 卿夏 氏의 長子, 26世 副正公派 廷旭(大宗會 顧問)氏는 巨金을 出捐하여 先考의 雅號를 딴 “友村 獎學會”를 大同 宗會 傘下에 設置, 宗事에 邁進하는 執行部에 힘을 실어 주었고, 모든 宗人의 龜鑑이 되었다.
우리 大同 宗會는 그간 수차례 發展과 退步의 浮沈을 繼續하면서도 오직 崇祖愛族의 基本 精神으로 和順 崔氏의 宗事에 臨하고 있다.
現 執行部는 첫째, 뿌리公園 造型物 設置, 둘째 始祖 烏山君 할아버님 墓所의 土地 所有權 確保와 墓域 聖域化라는 우리 和順 崔氏의 큰 課題를 推進하고 達成해야 할 짐을 지고 있다.
當面한 이 宗事가 아름답게 成就되어 後裔들이 큰 人物로 功을 이루는 힘의 源泉이 되기 바란다. 또 우리 宗人 모두가 構成하는 和順 崔氏 大同 宗會의 無窮한 發展을 祖上들께서 陰佑하시기를 祈禱하며 和順 崔氏 大同 宗會의 略史가 悠久한 歷史로 永遠하기를 빈다.
|